캐릭터 (아버지와 아들, 침묵, 계급)
부모를 닮지 않으려고 발버둥 칠수록 어느새 그 사람의 말투가 나오고, 그 사람의 눈빛이 거울에 비치는 경험을 해보신 적 있으십니까. 저는 이 영화를 보면서 딱 그 느낌을 받았습니다. 1997년 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을 수상한 네덜란드 영화 〈캐릭터(Karakter)〉는 1920년대 로테르담을 배경으로 냉혹한 아버지와 그 아버지를 이기려는 아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단순한 성공 서사처럼 보이지만, 다 보고 나면 꽤 오래 마음에 걸립니다.
아버지와 아들, 누가 누구를 키운 걸까
영화의 중심축은 집행관 드레버하벤과 그의 사생아 아들 야콥 빌럼 카타드뢰페 사이의 대결 구도입니다. 여기서 집행관(deurwaarder)이란 법원의 명령을 현장에서 직접 집행하는 사람, 쉽게 말해 빚을 갚지 못한 사람의 재산을 압류하거나 퇴거를 강제하는 공무 집행관을 의미합니다. 드레버하벤은 이 역할을 가난한 사람들에게조차 추호의 예외 없이 적용하는 인물로, 영화 속에서 "가난한 자들의 공포 그 자체"라는 평을 듣습니다.
제가 직접 영화를 보면서 처음에는 드레버하벤을 단순한 악역으로 읽었습니다. 아들이 담배 가게를 열려고 국민신용공사에서 대출을 받았는데, 알고 보니 그 은행이 드레버하벤 소유였습니다. 아들은 아버지 손에 파산 위기에 몰립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짓밟으려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중반부를 넘어서면서 이 해석이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드레버하벤은 파산 절차에서 아들의 책에 15길더라는 낮은 가격을 매겨 경매로 넘어가지 않게 만듭니다. 합리적 조건으로 분할 상환을 제안하고, 정작 진짜 파산 선고가 내려질 순간엔 법정에 나타나지 않습니다. 이것은 적의가 아닙니다. 오히려 치밀하게 설계된 저항 훈련에 가깝습니다.
영화 말미에 야콥이 스스로 말합니다. "드레버하벤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고. 아들이 성공을 이뤄도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는 공허함을 느낄 것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저는 이 장면에서 소름이 돋았습니다. 아들을 강하게 만든 것이 아버지의 장애물이었고, 냉혹하고 고집 센 아들의 모습 속에서 점점 아버지의 얼굴이 겹쳐 보이기 시작했으니까요. 미워하는 사람을 닮아 간다는 것, 이 영화에서 가장 섬뜩하고 동시에 가장 슬픈 부분이었습니다.
- 드레버하벤: 1920년대 로테르담의 냉혹한 법원 집행관, 사생아 야콥의 생부
- 야콥: 어머니 성을 따르고 아버지를 부정하며 스스로 변호사가 됨
- 두 사람의 대결 구도는 결국 "아들은 아버지를 이기려다 아버지가 된다"는 아이러니로 귀결됨
침묵으로 모든 것을 말한 어머니 요바
영화에서 가장 조용한 인물이 가장 강한 인물입니다. 야콥의 어머니 요바는 드레버하벤의 가정부였다가 아이를 가진 뒤 그 집을 떠나고, 이후 드레버하벤이 보낸 청혼과 우편환을 1년 넘게 반송하며 거부 의사를 행동으로만 표현합니다. 대사 한 마디 없이, 편지 한 통 없이.
심리학에서는 이처럼 말 대신 행동으로 감정과 의지를 표현하는 방식을 행동화(acting out)라는 개념으로 설명하기도 합니다. 여기서 행동화란 내면의 감정을 언어로 표현하지 않고 행동으로 직접 드러내는 것을 의미하는데, 요바의 경우는 그보다 훨씬 조용한 형태입니다. 그녀는 폭발하지도 않고, 설명하지도 않습니다. 그냥 돌아서고, 그냥 버팁니다.
솔직히 이건 처음 볼 때 답답했습니다. 왜 아들에게 아버지에 대해 설명하지 않는지, 왜 그 많은 돈을 계속 돌려보내는지, 시원하게 말해주는 장면이 없으니까요. 그런데 생각해 보면 요바가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오히려 더 많은 것이 전달됩니다. "우린 그 사람한테 아무것도 필요 없어"라는 단 한 마디가 그녀의 모든 철학을 담고 있습니다.
무뚝뚝한 가족 관계가 낯설면서도 어딘가 익숙하게 다가온 건 저뿐만이 아닐 겁니다. 다정한 말 한마디 없이 묵묵히 곁에 있어 주는 방식, 그게 어떤 가족에게는 유일한 사랑의 언어이기도 하니까요. 요바는 영화 내내 거의 말을 하지 않지만, 그녀의 침묵은 야콥의 성격 전체를 설명하는 가장 긴 독백이었습니다.
계급과 법, 1920년대 로테르담이 배경인 이유
〈캐릭터〉는 페르디난트 보르흐르베인크의 1938년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합니다. 1920년대 네덜란드 로테르담이라는 시공간 배경이 영화의 계급 서사를 가능하게 하는 구조적 토대입니다. 당시 네덜란드는 경제 불황과 사회 불평등이 깊어지던 시기였고, 법과 채권 집행 제도가 가난한 계층을 억압하는 도구로 기능하던 현실이 있었습니다. 실제로 당시 네덜란드에서는 채무자 보호 규정이 매우 제한적이었고, 집행관의 권한이 광범위하게 인정되었습니다(출처: 네덜란드 국립도서관(KB)).
야콥이 담배 가게 창업 자금으로 900길더를 빌리고 파산 위기에 몰리는 과정, 백과사전 T 항목까지만 있는 낡은 사전으로 독학하는 장면, 변호사 사무실에서 잡심부름부터 시작해 사무장 자리까지 오르는 과정은 모두 계급 이동(social mobility)의 이야기입니다. 계급 이동이란 개인이 태어난 사회경제적 위치를 교육이나 노력으로 넘어서는 것을 뜻하는데, 이 영화는 그 과정이 얼마나 고통스럽고 아이러니한지를 담담하게 보여줍니다.
제 경험상 이런 배경 지식 없이 보면 중반부의 법률 절차 장면들이 다소 낯설고 지루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파산 신청, 자산 평가, 채권자 수 산정 같은 절차들이 극적 긴장감보다 설명처럼 흘러가는 부분이 있거든요. 하지만 그 절차 하나하나가 야콥이라는 인간을 만든 재료라는 점에서, 오히려 서사의 밀도가 느껴지기도 합니다.
얀 데클레어가 연기한 드레버하벤은 말없이 서 있기만 해도 압도적 존재감을 보여줍니다. 어둡고 축축한 로테르담의 거리와 건물은 그림처럼 아름답지만 동시에 답답하고 무겁고, 폭풍우 속 강제 집행 장면처럼 화면 자체가 인물들의 차갑고 거친 성격을 닮아 있습니다. 영화적 리얼리즘(cinematic realism), 즉 현실의 질감을 과장 없이 화면에 담아내는 기법이 이 영화의 가장 큰 미덕입니다. 1997년 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 수상이 괜한 것이 아니었습니다(출처: 미국 영화예술과학아카데미(AMPAS)).
자주 묻는 질문
Q. 캐릭터(1997) 영화는 어디서 볼 수 있나요?
A. 국내 주요 스트리밍 서비스에서 상시 제공되지는 않습니다. 유튜브에서 일부 클립이나 전체 영상을 검색할 수 있고, DVD나 디지털 구매 방식으로 감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저는 유튜브 링크를 통해 처음 접했습니다.
Q. 드레버하벤이 아들을 진짜로 미워한 건가요, 아니면 일부러 시련을 준 건가요?
A. 영화는 이 질문에 명확한 답을 주지 않습니다. 그것이 이 영화의 의도적인 선택으로 보입니다. 파산 선고 직전 법정에 나타나지 않거나, 아들의 책에 낮은 가격을 매겨 경매를 막는 행동을 보면 단순한 적의로만 읽기 어렵습니다. 다만 그것이 사랑이었는지도 확신하기 어렵고, 그 모호함이 영화의 핵심입니다.
Q. 원작 소설과 영화의 차이가 있나요?
A. 원작은 페르디난트 보르흐르베인크가 1938년에 발표한 네덜란드 소설입니다. 영화는 원작의 구조와 핵심 서사를 충실히 따르면서도 시각적 표현과 배우의 연기로 소설의 묵직한 분위기를 재현했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소설을 먼저 읽고 영화를 보면 인물들의 내면을 더 풍부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Q. 영화가 전체적으로 느리고 어두운데 그래도 볼 만한가요?
A. 솔직히 중반부는 다소 느리게 느껴지는 것이 사실입니다.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인물들, 낯선 네덜란드 법률 절차, 어둡고 무거운 화면이 이어집니다. 하지만 영화가 끝나고 나서도 한동안 머릿속에 맴도는 작품을 찾는다면 충분히 볼 가치가 있습니다. 빠른 전개보다 여운을 선호하는 분께 권합니다.
결론
〈캐릭터〉를 다 보고 나서 가장 오래 남은 질문은 "야콥은 결국 무엇을 얻었는가"였습니다. 변호사가 되었고, 빚을 모두 갚았고, 아버지에게 마지막 작별을 고했습니다. 그런데 정작 본인이 말했듯 "모든 것을 이뤘지만 동시에 아무것도 얻지 못했습니다." 그 공허함이 이 영화의 진짜 주제입니다.
제 경험상 부모와 자식의 관계를 다룬 영화 중에 이렇게 감정을 절제하면서도 이렇게 깊이 파고드는 작품은 드뭅니다. 쉽게 볼 수 있는 영화는 아닙니다. 하지만 한 사람의 성격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우리가 거부하려는 것을 어떻게 닮아 가는지에 관심이 있다면 이 영화는 꽤 좋은 질문을 던져줍니다. 다음 번에는 원작 소설을 먼저 읽고 다시 한번 볼 생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