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코미디언 잭 화이트홀이 싸늘한 복수극의 주인공을 맡는다고 했을 때, 제가 처음 든 생각은 '과연 설득력이 있을까'였으니까요. 그런데 〈맬리스(Malice)〉를 끝까지 보고 나서는 그 의심을 거뒀습니다. 친절한 가정교사의 얼굴 뒤에 숨은 냉혹한 의도를 따라가다 보면, 악의가 항상 무서운 얼굴로 오지는 않는다는 걸 새삼 실감하게 됩니다.
잭 화이트홀의 반전 — 친절한 얼굴이 가장 무섭다
제가 직접 처음 에피소드를 틀었을 때, 애덤은 그냥 붙임성 좋은 청년이었습니다. 아이들과 물놀이를 즐기고, 술집에서 농담을 주고받고, 상황마다 적절한 센스를 발휘하는 사람이요. 그런데 카메라가 다른 인물로 넘어가는 순간, 애덤의 표정이 딱 한 박자 늦게 꺼집니다. 그 0.5초가 드라마 전체를 꿰뚫는 핵심이었습니다.
드라마는 처음 장면부터 이미 뭔가 끔찍한 일이 벌어졌다는 것을 알려 주고 시작합니다. 이른바 '인 메디아스 레스(In Medias Res)' 구조인데, 쉽게 말해 사건의 한가운데에서 시작한 뒤 과거를 채워나가는 방식입니다. 덕분에 평범한 점심 식사 장면에서도 저는 내내 불안했습니다. '지금 이 친절함이 언제 무너지나'를 기다리게 되는 거죠.
애덤이 구사하는 수법은 꽤 정교합니다. 조디의 음식에 몰래 손을 대 컨디션을 망가뜨리고, 제이미의 와이셔츠에 핏자국을 묻혀 두고, 해킹 프로그램이 심긴 파일을 보내 회사 이메일을 조작합니다. 이 과정에서 제이미는 점점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상황으로 몰립니다. 가스라이팅(Gaslighting)에 가까운 심리 조작인데, 여기서 가스라이팅이란 상대방이 현실 인식을 스스로 의심하게 만드는 심리적 통제 기술을 말합니다. 〈맬리스〉는 이 구조를 꽤 집요하게 밀어붙입니다.
잭 화이트홀의 연기에서 제가 가장 인상 깊었던 건 '과하지 않다'는 점이었습니다. 악역이라고 해서 눈을 부릅뜨거나 목소리를 낮추지 않습니다. 오히려 늘 웃고, 먼저 걱정해주고, 자연스럽게 자리를 채웁니다. 그게 훨씬 더 섬뜩했습니다. 실제로 이런 유형의 조작적 인물은 신뢰를 쌓는 데 공을 들인다는 점에서, 애덤의 행동 방식은 심리학에서 말하는 다크 트라이어드(Dark Triad) 성향과 닮아 있습니다. 다크 트라이어드란 나르시시즘·마키아벨리즘·사이코패시 세 가지 반사회적 성격 특성을 묶어 부르는 개념으로, 출처: 미국심리학회(APA)에서도 이 성향이 타인을 도구적으로 대하는 행동 패턴과 연관된다고 설명합니다.
- 인 메디아스 레스 구조 — 첫 장면부터 불안감을 심어 놓는 서사 전략
- 가스라이팅 — 제이미가 스스로를 의심하게 만드는 단계적 심리 조작
- 다크 트라이어드 성향 — 애덤의 행동이 학문적으로도 읽히는 지점
- 잭 화이트홀의 절제된 연기 — 과하지 않기에 오히려 더 위협적
스릴러로서의 완성도 — 잘 만들었지만 아쉬운 것도 있다
데이비드 듀코브니가 연기한 제이미 테너는 돈과 인맥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해 온 벤처 투자자입니다. 그가 과거에 투자한 가방 회사 틸더먼이 파산하면서 그 회사 아들이 바로 애덤이었다는 반전은, 드라마가 쌓아온 복수극의 동기를 뒤늦게 채워 줍니다. 그런데 솔직히 이 지점이 제 경험상 가장 힘 빠지는 순간이었습니다. 그토록 정교하게 쌓아 온 긴장감인데, 복수의 이유가 마지막 회에서야 급하게 풀리니까요.
'벤처 캐피털(Venture Capital)'이라는 배경 설정도 드라마에 꽤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벤처 캐피털이란 성장 가능성이 있는 기업에 자본을 투자하고 수익을 기대하는 금융 방식인데, 문제는 투자 실패의 책임이 어디까지인지가 늘 불분명하다는 점입니다. 제이미는 틸더먼에 투자했다가 회수에 실패한 것일 뿐이라고 말하고, 애덤은 그 결정이 자기 가족을 파괴했다고 말합니다. 누가 옳고 그른지 쉽게 단정할 수 없는 구조인데, 이 부분이 드라마에서 가장 흥미로운 윤리적 균열이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중반부를 보면서 조금 지루함을 느낀 것도 사실입니다. 애덤이 가족에게 서서히 파고드는 과정은 꽤 길게 이어지는 데 비해, 긴장감이 계속 유지되지는 않았습니다. 더 솔직히 말하면, 애덤의 계획이 워낙 대담한데도 태너 가족이 너무 오래 눈치채지 못하는 장면들은 현실감이 떨어졌습니다. 줄스가 뭔가 이상하다고 느끼고 남편 데이미언이 조사에 나서는 흐름은 살아 있지만, 그게 결정적인 순간으로 이어지기까지 너무 많은 우연이 끼어들었습니다.
등장인물의 입체성 측면에서도 아쉬움이 남았습니다. 내러티브 심리학(Narrative Psychology) 관점에서 보면, 설득력 있는 인물은 단순한 기능(가해자·피해자)을 넘어 내면의 모순을 드러낼 때 더 생생하게 느껴집니다. 여기서 내러티브 심리학이란 인간이 자신의 삶을 이야기 구조로 이해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방식을 연구하는 분야입니다. 〈맬리스〉의 인물들은 '무심한 부자'와 '복수하는 남자'라는 틀 안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고, 훌륭한 배우들을 충분히 써먹지 못했다는 인상이 강하게 남았습니다. 출처: BBC Culture에서도 최근 스릴러 드라마들이 인물 심리 묘사에 더 공을 들이는 추세라고 짚은 바 있는데, 〈맬리스〉는 그 점에서 아쉬운 선택을 했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맬리스 드라마, 어디서 볼 수 있나요?
A. 〈맬리스〉는 영국 ITV에서 방영된 미니시리즈입니다. 국내에서는 OTT 서비스 제공 여부가 시기마다 다를 수 있어, 현재 이용 가능한 플랫폼을 직접 확인해 보시는 것이 확실합니다. 제가 본 건 유튜브 요약 영상을 통해서였는데, 전체 분위기를 파악하기에는 충분했습니다.
Q. 잭 화이트홀이 악역을 맡았다는 게 어색하지 않나요?
A. 저도 처음엔 그 의문을 가지고 봤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보면 어색함이 오히려 강점이 됩니다. 코미디 이미지에 익숙한 얼굴이 섬뜩한 의도를 감추고 있다는 설정이, 시청자까지 속이는 효과를 냅니다. 절제된 연기였기 때문에 더 무섭게 느껴졌습니다.
Q. 애덤이 복수를 결심한 이유가 뭔가요?
A. 애덤의 아버지가 운영하던 가방 회사 틸더먼에 제이미가 투자했다가 철수하면서 회사가 파산했고, 이후 부모가 화재 사고로 사망합니다. 애덤은 이 모든 불행의 출발점이 제이미의 결정이었다고 믿고 복수를 계획합니다. 다만 드라마는 그 책임이 정말 제이미에게만 있는지를 명확히 판단하지 않아, 보는 내내 묘한 불편함이 남습니다.
Q. 결말이 어떻게 되나요? 애덤은 잡히나요?
A. 애덤은 복수의 마지막 단계에서 제이미와 직접 대면하고, 그 와중에 과거 제이미와 땅 분쟁이 있었던 인물의 아들이 등장해 예기치 않은 방식으로 상황이 마무리됩니다. 결말 자체는 다소 열린 여운을 남기는데, 제가 보기엔 기다린 것에 비해 충격이 크지 않았습니다. 반전보다는 씁쓸한 마무리에 가깝습니다.
결론
〈맬리스〉를 다 보고 나서 제가 가장 오래 생각한 건 드라마의 완성도가 아니었습니다. '나는 주변 사람의 아픔에 얼마나 무관심했을까'라는 질문이었습니다. 제이미는 나쁜 사람이 아닙니다. 그냥 바쁘고, 자기 세계에 몰두해 있고, 타인의 결과에 무심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무심함이 누군가의 삶을 무너뜨릴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사람이 언젠가 가장 친절한 얼굴로 돌아올 수 있다는 것이 이 드라마가 남기는 진짜 서늘함이었습니다.
완성도만 놓고 보면 중반부의 늘어짐과 인물의 평면성은 분명한 약점입니다. 그럼에도 잭 화이트홀의 연기와 계급 풍자라는 날 선 설정만으로도 볼 이유는 충분합니다. 스릴러보다는 심리극에 가깝고, 통쾌한 복수극을 기대했다면 조금 다른 맛이 날 수 있습니다. 그 점을 알고 보면 실망도 줄어들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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